식량의 세계사
톰 스탠디지 지음｜박중서 옮김｜웅진지식하우스｜360쪽｜1만6800원

1802년 나폴레옹이 최고 훈장인 '레지옹도뇌르'를 제정했을 때 처음 이 훈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앙투안 오귀스트 파르망티에라는 사람이다. 그는 감자를 프랑스에서 대중화해 식량난을 해소했다는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파르망티에의 최대 후원자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 16세 부부는 자신들의 생일 파티에서 감자 요리를 먹었고, 감자꽃으로 옷을 장식하며 감자를 '빈민의 빵'이라 부르며 감자의 재배와 소비를 권장했다. 루이 16세 부부는 프랑스대혁명 와중에 처형됐지만 파르망티에는 훈장까지 받았던, 감자에 얽힌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다.

이 책은 인류 문명의 고비마다 식량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 추적한다. 저자는 "농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우리가 먹는 밀, 쌀, 옥수수는 1만년 전 신석기시대 인류가 유전공학의 산물로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의 밀, 쌀, 옥수수 등은 번식을 위해 어느 정도 여문 다음엔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낱알이 흩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말이다. 하지만 인류는 알갱이가 쉽게 흩어지지 않는 종(種)을 따로 모아 재배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인간과 서로 의지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농업혁명'이다. 사실 농업과 정착생활이 인류의 건강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스와 터키에서 발굴된 인류의 뼈를 봐도 기원전 1만5000년 전 수렵 채집민의 평균 신장은 남성 175㎝, 여성 165㎝였는데 농사가 채택된 후인 기원전 3000년쯤엔 남성이 160㎝, 여성은 152㎝로 더 작아졌다. 수렵 채집 시절 75종 정도의 곡물을 먹다가 농사를 지으며 일부 작물만 섭취함에 따라 영양공급의 편중으로 인한 질병도 만연했다. "농사의 채택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식량 공급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향신료 문제가 등장했다. 유럽인들은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어디서 생산되는지도 모른 채 비싼 값을 치르고 향신료를 수입해야 했다. 대항해시대,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은 황금뿐 아니라 새 향신료 루트를 뚫기 위한 목적도 컸다. 그러나 향신료에 관한 한 이 탐험은 실패였다. 콜럼버스는 후추와 비슷한 기능을 한 고추를 가져왔지만 고추는 유럽뿐 아니라 어디서나 기르기 쉬웠기 때문. 그렇지만 식량혁명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위로는 '국왕의 과일'로 불렸던 파인애플에서 아래로는 구황작물로 각광받게 된 감자와 고구마, 토마토, 초콜릿에 이르기까지 신대륙의 작물을 대거 유럽 등 구대륙으로 옮겨왔다. 신대륙으로는 커피, 설탕, 밀, 바나나가 유입됐다. 이른바 '콜럼버스의 교환'이다.

식량 무기화 역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 전쟁의 승패 역시 식량 보급에서 결정됐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주둔지에서 반경 4일 이내 거리에서만 식량을 징발하도록 하는 원칙으로 동방 원정을 성공한 반면 "군대는 배(腹)로 행군한다"고 했던 나폴레옹은 보급의 실패로 겨울이 닥치기도 전에 러시아 원정에 사실상 패했다는 것.

인류의 기아(饑餓)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한 '녹색혁명'을 거쳐 20세기까지 식량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 저자는 책 말미에 노르웨이 스피츠베르겐 섬에 있는 스발바르 세계 종자 저장소를 소개한다. 철옹성처럼 지어진 이 종자 저장소엔 수십억개의 종자가 보관돼 있다. 저자는 "이 저장소의 목적에서 신석기시대의 메아리가 들려온다"고 말한다. 언젠가 어떤 이유로 인류가 문명을 처음부터 재건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문명의 맨 아래에 놓인 기반이 농업, 즉 식량문제라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