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8일 밤, 속초 황소광장에서 속초.고성.양양 시민 70여명이 국정원을 규탄하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국정원 규탄, 촛불문화제를 다녀와서

그들은 비에 젖은 촛불을 들고 있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비가 내린 18일 밤, 속초 황소광장에는 비옷을 입은 속초고성양양시민노동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국정원을 규탄하는 촛불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행사 시작 10분전, 비가 와서 그런지 광장에는 대여섯 명의 시민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고, 지나가는 행인조차 보이지 않는다. 행사를 준비하는 관계자들은 제법 굵은 비를 뿌려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리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쳐다본다.

행사시간이 가까워지자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바닥 타일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튀어 올라 바지가랑을 적신다. 사회자의 행사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를 따라 광장을 쳐다보니 어느새 비옷과 우산을 쓴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사회자는 (감격해 하며) “빗소리에 우리의 목소리가 묻혀 버릴까봐 걱정했다. 이 비를 뚫고 오신 당신들이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투사로 보인다”며 참석한 시민들을 반겼다.

이어진 행사에서 참석한 시민들에게 자유발언 시간이 주어졌다. 자발적인 참여자가 없자,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김경준(가명‧72) 전직 교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과거의 안기부(안전기획부) 만행을 고발했다. “그들은 정권안보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면 시민들을 가차 없이 공격했고, 특히 지식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고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공권력을 이용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는 불법을 저질렀고, 더욱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10‧4 남‧북 정상회담 때 노무현대통령의 NLL 발언을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언론과 정치권에 흘려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이런 국정원을  두고 어떻게 이 땅에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겠나”고 목소리를 높이자 시민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그는 이어서 구수한 목소리로 선구자를 불렀다. 광장에 있는 시민들도 함께 따라 불렀다. 그러자 광장을 지나는 행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가기도 하고 지나가던 차안에서 손을 흔드는 운전자도 보인다.

이때 해병대 모자를 쓴 50대 중년 남자가 광장에 나타나 “빨갱이들 물러가라”며 고성을 지르고 행패를 부리자 잠시 소란이 일기도 했다. 출동한 경찰이 그를 제압하자 광장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계속해서 욕설을 퍼 부었다.

또다시 이어진 자유토론에서 내일을 여는 속초시민연대에서 나온 임경수(가명‧49)씨는 국정원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세우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구호제창을 통해 “선거 개입, 여론 조작 국정원은 해체하라”고 외쳤고, 시민들도 구호에 따라 해체하라, 해체하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사회자가 피켓에 헌법 제1조 어디 갔어? 라고 쓴 시민을 부른다)

그는 “헌법 제1조 2항에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을 열거하고는 “헌법에 기록된 국민주권이 상실됐고,  민주주의가 파괴 되었습니다”라고 헌법을 위반하고 있는 정부와 국정원을 싸잡아 비판했다.

이에 양양시민연대에서 온 전광일(가명)씨도 헌법을 훼손하고 있는 국정원을 향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 것 같다. 모든 권력은 국정원으로부터 나온다”고 비꼬았다.

▲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한 시민이 '헌법 제1조 어디갔어?'라고 쓴 손 팻말을 들고 있다

▲ 촛불문화제에서 자유발언을 하고 있는 신창현 (민주당, 속초고성양양지역위원장)위원장

속초고성양양민주당 지역위원장인 신창현 위원장은 자유발언을 통해 국정원 규탄대회와 관련해 “교수, 역사학자, 연극인, 변호사, 대학생, 해외의 한인동포,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국정을 비판하고 있다. 빼앗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규탄대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어 국정원을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돌아가신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시킨 새누리당과 국정원을 반드시 심판해야 된다”고 날을 세웠다.

<70여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

자유발언에 이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에 메아리쳤다. 민주헌정의 기본질서가 위협받는 엄중한 상황임을 알리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시국선언문에는 공작정치를 자행한 국정을 규탄했고, 노무현 전 대통의 NLL발언을 왜곡한 정문헌 국회의원과 새누리당을 비판한 후, 이를 방관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까지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자 하늘은 한층 더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었고, 비도 장대비로 변했다. 그 비를 뚫고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지금부터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합니다. 여기 광장을 출발해 청학삼거리를 돌아 다시 황소광장으로 돌아올 예정입니다”라고 방송을 마치자 시민들은 촛불을 부치기 위해 삼삼오오 차량으로 모여들었다.

방송용 차량이 앞에 서고 그 뒤를 따라 촛불을 든 70여명의 시민들이 두 줄로 따라 나섰다. 경찰은 비옷을 입고 차도에서 차량의 수신호에 한창이다. 그들의 수신호에 따라 차량들도 큰 혼잡 없이 통행하고 있다. 조금 지나자 비에 젖은 촛불들이 하나 둘씩 꺼지기를 반복한다. 꺼진 촛불을 다시 살리기 위해 옆에 있는 짝꿍에게 촛불을 빌리는 모습들이 이따금씩 눈에 들어온다.

굵은 장대비에 옷과 신발은 젖은 지 오래고 “국정원 해체”라고 쓴 종이 팻말도 힘없이 꺾인다. 자꾸 꺼지는 촛불을 살리기 위해 라이터를 켜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촛불을 든 행렬을 피해 잠시 차도로 내려온 행인들도 있고, 무심코 지나가는 인파들 속에 유심히 행렬들을 쳐다보는 학생들도 눈에 띤다.

행렬을 인도하는 차량에서는 국정원을 비판하는 내용이 스피커를 통해 시내에 울려 퍼진다. “국정원은 해체하고, 국정원장을 파면하라‧‧‧.” 중심상가는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은 없고 가게를 지키는 주인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무관심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는다. 가끔씩 문을 열고 관심을 표하는 상인도 더러 보인다. 그새 반환점인 청학삼거리에 도착했다. 길을 건너는 행렬이 중간 중간 끊겨 있다. 이때 방송에서 “대열을 유지해 주세요. 두 줄로 행진해 주세요.”라고 외친다. 이어 행진에서 잠시 이탈한 시민들을 향해 “빨리 행렬로 들어와 주세요”라고 말하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시민들이 있다.

▲ 비가오는 가운데에서도 촛불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 시민들. 이들은 속초 황소광장에서 출발해 청학삼거리를 돌아 광장까지 돌아오는 거리 행진을 벌였다

반환점을 돌자 촛불은 비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꺼진 촛불을 들고 묵묵히 걷는다. 그 와중에도 연인관계로 보이는 이들은 시국과 관련해 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도대체 국정원은 왜 그랬을까? 앞으로 국정원은 어떻게 될까? 노무현대통령은 정말 NLL을 북한에 내 주려고 한 것일까?” 등의 말이 이어졌다. 옆에 있는 친구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서 대답을 읽을 수 있었다.

도착지인 황소광장에 거의 다다르는 가운데에서도 방송용 차량을 탄 연설원은 시국선언문을 재차 낭독하고 있다.

장대비를 맞으며 도착한 광장에는 환한 표정의 시민들로 가득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국정원은 해체하라, 국정원장은 사퇴하라‧‧‧”는 구호로 이 행사를 마무리하며 해산했다.